예수를 만난 사람

본문 눅19:1-10

조성모 목사

 

 

서론:

 

사람은 출생하면서부터 만남으로 시작이 됩니다. 어린 아기 때에는 부모를 만납니다. 유년기와 청소년 시절에는 선생님을 만납니다. 청년이 되어서는 배우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만남은 부모와 스승보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 진정한 기쁨과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를 만난 사람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1-2)

 

예수님께서 여리고 라는 도시로 지나가십니다. 여리고는 오래된 도시이지만 결코 좋은 도시는 아닙니다. 그 도시에는 불량배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강도를 만났다 하면 여리고 입니다. 그러기에 그 도시는 불안하고 공포의 도시입니다. 한 마디로 저주의 도시인 것입니다. 그 곳에 삭개오 라는 세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이스라엘 동족의 피를 갈취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도둑이나 강도나 다름이 없는 자입니다. 세리들은 즉, 세금을 징수하는 자들은 유대인들 사회에서 매우 비천한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유대 공동체 사회로부터 추방되거나 소외된 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 존재의 취급을 받지 못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동족들로부터 평판이 좋지 않는 반감의 대상입니다.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로 있기 때문에 항상 정치적으로는 불안하고 경제적으로는 안정이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삭개오 라는 세리장은 세리들 중에서도 우두머리이고 부유한자입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세금을 착취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로마 총독이 세금을 징수하라는 명령에 충성하는 자입니다. 세리장의 위치에 있는 자라면 매우 지혜롭고 명철한 사람입니다. 로마 정부에게 충성하고 자기의 이익을 많이 챙깁니다. , 로마 정부에는 조금 반납하고 자신이 더 많은 소득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런 세리들은 유대사회에서는 상대하지 못할 존재요 가치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십니다. (7:34) 그러므로 은혜에는 어떤 차별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21:31)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죄인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복음이 죄인들에게 향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증언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3:22) 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의가 옷 입혀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라고 합니다.

 

칭의는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님이 나에게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정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1)

 

우리에게 어떤 허물이 있어도 정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모두에게 차별이 없는 구원의 은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2. 예수를 알기 위하여서는 개인적인 만남을 가져야만 합니다. (3-4)

 

 

삭개오는 우리 주님을 보기를 원하였지만 무리가 너무나 많아서 우리 구주께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키가 너무나 작아서 사람들이 등 뒤에 가려져 주님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젊은 청소년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었지만 나무 위에 올라가 앉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키가 작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포기하지 아니하고 나무에 올라갑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고 비난하지만 개의치 아니합니다. 그는 사람들의 비방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키에 대한 약점이 있어도 문제 삼지 아니합니다.

 

이것이 삭개오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신앙의 장점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은 천천히 만나더라도 우리 주님을 만나는 것을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난 이후의 삶은 세상보다 우리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의 삶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29:13) 사람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기를 구하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 주님은 삭개오를 먼저 알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보시고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는 것입니다. (5)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속히 내려오라고 하실 때에 지체하면 안 됩니다.

삭개오의 집에 우리 주님이 유하시겠다는 것은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지체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단 일분도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하고 명심합시다. 우리가 오늘의 기회를 상실하면 어떤 행복도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아무리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렸다 하더라도 오늘이라고 하는 구원의 기회를 놓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영국의 스펄전 목사는 말합니다. “내일이라는 단어는 달력에 씌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삭개오에게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낮은 자리라도 있으면 내려가고 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그분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실수와 거짓과 부패함을 우리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구주가 더 깊이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세리장의 신분에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거짓과 위선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바르게 사는 것은 기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초적인 삶을 지금까지 정직하게 살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오늘부터는 바르게 살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삭개오가 세리장의 자리에서 내려오면 당장 해고될 것처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고 나무에서 내려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교만과 고집의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합니다. 교만하여서 망하는 것보다는 납작하게 엎드려 겸손하여 은혜를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보면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우리 주님을 모신 가정은 평안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John, Calvin)은 결과적으로 볼 때에 삭개오의 마음속에는 처음부터 경건의 씨앗(pietatis semen)이 들어있었다는 것이 확인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뭇 사람이 이 광경을 보고 수근 거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개오는 사람들의 시선과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합니다. 즐거워하며 주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는 일에 있어서 어떤 방해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뛰어 넘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 주님의 나의 구주요 구세주로 영접하고 교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수근 거리는 이유는 예수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7) 우리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난 이후에는 사람들의 비난도 조롱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아니합니다. 우리들이 죄인이지만 우리 주님은 의롭다고 인정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잘 믿기만 하면 다른 사람도 감동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5:32) 이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성경은 증언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3:10-13)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세상에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9:12)

 

3. 예수를 만난 자는 철저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8) 삭개오의 회개와 변화된 모습입니다. 우리 주님이 삭개오의 집에 유하신 것을 보고 사람들은 죄인의 소굴에 들어갔다고 말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것입니까? 그것은 그에게 거룩한 사명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죄인의 집이라 할지라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방문하시면 지옥일지라도 천국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집이 온통 죄의 문으로 덮여있다고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아니합니다. 그는 과거에는 돈 밖에 모르는 자입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고 자기 욕망에 도취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들어가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비난 받는 세리들과 창녀들과 살인자나 강도나 두둑이나 어떤 죄인들이라 할지라도 우리 주님께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 구원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구원 받을만한 기회요 은혜의 날입니다. 이 기회를 놓쳐버리면 영원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직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어야만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가 많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 순간에 그에게 묶여있던 죄악의 쇠사슬이 풀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마비되었던 양심이 살아납니다. 그의 영혼에는 기쁨이 넘칩니다.

 

그리고 그가 주님께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는 자기 소유의 절반은 도둑질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라고 회개하고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을 만난 사람은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결단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니까 변화되고 사명이 주어집니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겠다고 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대단한 일입니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고 나면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나눌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나눌 때에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도 사로 나누면서 베풀며 삽시다. 움켜쥐고 사는 사람은 사실은 부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곤고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삭개오는 예수님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삶이 완전히 변화가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과거를 묻지 아니하십니다. 우리 주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 인생은 긴 것 같지만 결코 길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오래 산다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천국에서 사는 것에 비교하면 짧은 생애인 것입니다. 화살처럼 빨리 지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는 기회에 우리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구주를 만나기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합시다. 그리고 우리 주님을 만난 이후로는 새로운 삶의 이정표를 가지고 후회함이 없는 신앙생활을 합시다. 우리들에게 우리 구주께서 은혜와 복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