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성도는 행복 바이러스 퍼뜨립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놀라운 기쁨을 지금, 전하고 있습니까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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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자신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소개하고,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한 후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페이라스모스, 시련, trials)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즉 ‘시련 중에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시련&기쁨’ 이 단어를 야고보는 왜 연결해서 기록했을까요?


시련에 대한 나쁜 신학

어떤 성도는 시련을 당하게 되면 “내게 왜 이런 시련이 찾아왔는가”하는 생각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만약 예수를 잘 믿고 교회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많이 하니까 어떤 고통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이런 신학은 좋은 신학일까요? 아닙니다. 나쁜 신학입니다. 나쁜 신학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은 시련 자체의 고통보다 나쁜 신학에서 비롯된 ‘생각’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받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잘 믿으면 어떤 고통도 없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죄를 짓기 전의 에덴동산과 구원이 완성되는 천국에는 어떤 고통도 없겠지만, 과거의 에덴동산과 미래의 완성된 천국 사이의 오늘, 즉 현재에는 시련이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으면 시련이 없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장 12~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시련 중에 기쁨, 그 역설적 진리

야고보는 시련 중에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신약성경 원어인 헬라어로 보면 ‘모든 기쁨(파사 카라)으로 여기라’는 뜻입니다. 순수한 기쁨, 온전한 기쁨,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라고 합니다. 시련을 당하면 걱정의 홍수에 떠내려가기도 하고, 절망의 블랙홀에 빠져들기도 하지요. 그런데 시련을 당할 때 온전한 기쁨으로 기뻐하라고요? 이것은 충격이요, 당혹이요, 혼란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역설적 진리가 있습니다.

질문을 던져볼까요? ‘누가’ 이런 권면을 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야고보는 예수 형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붙잡으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막 3:21). 예수 형을 보고 도무지 구원자라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요 7:2~5).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요? 예수 형을 보고 미쳤다던 야고보가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주’(퀴리오스)는 단순히 주인어른이란 뜻이 아닙니다. ‘주’는 7절에 보면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 ‘주인 하나님’입니다. 야고보는 예수 형을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또한 야고보는 예수 형을 인간의 죄와 사망과 모든 문제와 고통을 해결해 줄 그리스도(메시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120명과 함께 기도에 전력투구할 정도로 기도의 용사였습니다(행 1:14).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총회장(행 12:16~17; 15:12~21)이었고, ‘의인 야고보’란 별명도 가졌습니다. 인생 마지막에 야고보는 돌과 곤봉에 맞아 순교를 하였습니다. 야고보는 형 예수가 하나님이요, 메시야요, 절대자 주인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신앙을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순교를 선택했습니다.

야고보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었을까요? 야고보는 예수 형이 ‘미친 사람치고는 너무도 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부활한 예수님이 동생 야고보에게 직접 나타나셨습니다(고전 15:7).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전격적으로 변했습니다. 야고보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도 예수님처럼 시련 중에 말할 수 없는 ‘순수한 기쁨’ ‘온전한 기쁨’ ‘모든 기쁨’을 체험하였습니다. 시련 중에도 기쁨의 샘물이 솟구쳤습니다. 야고보는 흩어진 디아스포라의 형제자매들에게 구원주 예수님이 주시는 행복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싶었습니다.


참된 성도의 모습

참된 성도는 어떤 사람일까요? 참된 성도는 구원주 예수님의 행복 바이러스에 걸려 행복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사람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 진리를 깨닫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예수님이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하나님의 완벽한 의를 넘겨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야고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벧전 1:8) 그렇다면 여러분도 이미 놀라운 변화를 체험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사단의 통치영역에서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으로, 현세 지옥에서 현세 천국으로 귀화, 이민, 주거이전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변화를 체험한 여러분은 예수님이 주신 ‘행복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들어가면 가정이 행복해집니까? 여러분이 들어가면 직장이 행복해집니까?

행복 바이러스는 ‘사는 것이 어렵지만, 하나님은 좋아요’라는 고백을 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고,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시고,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가장 좋으신 하나님께서 기쁨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여러분 속에 항상 예수의 생명이 약동하고 흘러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된 소식, 행복의 소식, 즉 복음입니다. 세상에서 절대 시련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어떤 시련이든지간에 예수님께서 다 감당할 수 있도록 성도들의 마음속에 안정과 평안과 행복과 기쁨을 주신다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적용:신앙의 치어리더가 되라

시련을 당할 때에 ‘재수 없다, 망했다, 왜 나만 당해야 하냐’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시련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최악의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은 최선의 작품을 만들고 계신다고 생각하십시오. 그게 사실이니까요.

시련을 당할 때에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십시오. 기쁘지 않아도, 믿음으로 기뻐하십시오. 기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기뻐하십시오. 시련 속에서 기뻐했던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야고보처럼, 예수님처럼 우리는 기뻐해야합니다. 구원주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면서 신앙의 치어리더(cheerleader)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