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와 가톨릭 과연 하나될 수 있는가?
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하나 될 수 있는가? 가톨릭이 견지하고 있는 신학적 기조를 버리지 않는 한 하나 될 수 없다.
 
서창원 기사입력 2014/08/05 [08:30]
로마 가톨릭과 한국 개신교와의 신앙과 직제 일치에 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진행되고 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지난 3월 24일부터 27일까지 열린 서울 중곡동 천주교 중앙협의회에서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 협의회’(가칭)를 구성한다는 정관을 승인하였다. 한 주교 관계자는 말하기를 ‘그간 가톨릭과 개신교간 교회 일치를 위해 기도회와 포럼, 신학생 교류, 교단장 간담회 등 많은 행사를 지원해 왔고 지금까지 했던 일들을 쳬계적으로 공식화하기 위해 협의체를 구성하기로 했다’고 말했다(아이굿뉴스, 김동근 기자 4월 6일자 http://www.igoodnews.net)

그리고 지난 5월 22일 창립총회를 갖고서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이하 한신직)를 정식으로 출범하고 29일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제 14차 그리스도인 일치 포럼에서 <한국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신앙, 실천, 영성>이란 주제로 포럼을 갖았다. 이날 공동 표제는 천주교와 개신교, 함께 공부하고 행동하고 기도하자는 것이었다. 

가톨릭 뉴스측에서 발표한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포럼에 앞서 한신직 공동의장인 김희중 대주교(광주대교구장)는 “신앙은 인간적인 노력이 아니라 성령을 따르는 것”이라며 “그러기 위해 마음을 비우고 겸손한 자세로 성령의 역사하심에 우리를 맡기고 따라가야 한다. 진정한 일치를 위한 작은 징검다리를 놓는 우리의 실천을 주님께서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송용민 신부는 ‘교회 일치를 향해 함께 공부하기’라는 제목의 발제에서 천주교과 개신교 신학자들의 공동 작업한 공동번역 성서 발간(1977년), 한국신학연구소와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가 공동 번역한 <하나의 믿음>(1979년) 등 신학적 산물과 2000년 이후 천주교 주교회의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이뤄진 학문적 대화에 주목하면서, 일치운동에 관한 성직자 및 신자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송 신부는 그리스도교의 공동 협력과 대화를 위한 체계적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탁상공론식의 이론적 교육’을 경계하고 “현장 교육과 체험 실습이 병행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송 신부는 일치운동이 공유할 신학적 주제로 ▲ 일치운동의 성서적 근거와 신학적 정당성 ▲ 가톨리 교회와 개신교의 현재 관계에 대한 이해 ▲ 교회의 유기적 일치를 위한 보편성의 기준 ▲ 각종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제도와 현재 생활 및 영성 등을 제시했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인 <일치교령> 24항을 인용해 이런 일치를 위한 연구가 가톨릭교회가 고백해온 신앙에 합치해야 하지만, 동시에 “전통에 대한 충성심이 다른 그리스도교적 전통과 그들의 유산의 충만함을 무시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서 발표한 최주훈 목사는 교회의 ‘폐쇄적 교조주의’를 비판했다. “신학이 현장으로 스며들지 않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신학 강의를 위해 여기저기 다녀보면 소위 ‘정통’을 주장하는 곳일수록 교회는 일종의 ‘이데올로그들의 모임’이란 것을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교리를 만들어 자기 신앙고백전통을 ‘도그마화’하는 것은 필연적이지만 거기에 갇혀 남의 이야기는 전혀 들어보지도 않으려는 폐쇄적 교조주의가 만연한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이런 폐쇄적 신념체계, 즉 ‘나쁜 신학’은 필연적으로 진영 논리로 발전하고, 자기 진영에 속하지 않는 것들은 모두 적으로 간주해 공격적 성향을 띄게 된다.”
  
최 목사는 “고인 물은 썩게 된다”며 “교회일치의 최종 목표는 복음의 소망을 교회를 통해 공유하며 세상에 흘려보내는 데 있다”고 말했다. 목표는 복음 또는 하느님 나라의 통치이며, 수단이 ‘복음의 피조물인 교회’라는 것이다. 최 목사는 폐쇄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한 신학 교육의 과제로 ‘교단 신학자들 간의 교차 강의’를 제안했다. 최 목사는 이런 교차 강의가 신학생들로 하여금 신앙고백의 유형과 신학의 차이를 접하게 하고, 상호 비판적으로 대비하여 고민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설명했다.

‘함께 행동하기’라는 주제로 발표한 신정훈 신부는 “로마 가톨릭교회는 종교간 대화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4종류의 대화 즉, 삶의 대화, 행동의 대화, 신학자들의 대화, 영성의 대화를 구분한다”며, 그 중 ‘행동의 대화’는 사회 · 정치 영역에서 통합적인 인간의 해방을 촉진하기 위한 협력”이라고 말했다.

신정훈 신부는 1900년대 초 독립운동에서 1970년대 민주화운동, 문익환 목사와 문규현 신부의 방북에서 이어진 1980년대 이후 통일운동, 최근의 4대강 사업 반대 등에 이르기까지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가 협력한 사회 참여를 나열하면서, “사회 참여, 세상에 대한 봉사의 대화를 통해 신앙과 생활의 분리라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신 신부는 2000년 이후 각 지역에서 열린 사회복지 차원의 교회일치, 이웃종교 화합 차원의 연합바자회에 주목하면서 “이런 모델의 확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 신부는 이런 ‘행동’이 자신의 교단 활동과 신앙생활에만 초점을 맞춰 자칫 국소적인 시각에 고정될 위험에서 벗어나 “각자가 세계와 사회 안에서 어떤 자리에 있는지 볼 수 있는 폭넓은 안목을 기르게 해줄 것”이라 설명했다.

이어서 전철 목사는 “함께 행동하면서 사귐을 형성해 나갈 때 바로 그 안에서 상호 간의 진정한 이해가 열릴 것”이라며 “가톨릭과 개신교가 미래의 사랑과 평화를 공동으로 구상하고 실천하기 위해 만나는 것은 우리의 미래”라고 말했다. 전 목사는 무엇보다 일치 운동이 “사회의 바닥으로 내려야 한다”면서 “에큐메니칼 대화가 바닥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동력과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비판: 천주교와 기독교간의 대화는 갑자기 진행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 일치기도회는 1964년 제2차 바티칸 공회에서 ‘교회 일치의 재건’ 교령이 발표된 것을 계기로 1968년부터 지켜져 왔다. 세계적으로는 로마교황청과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행사를 치르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65년 천주교와 성공회만이 서로 방문하며 기도회를 진행하다가 86년부터는 개신교 교단까지 참여가 확대됐다. 
 
특히 2000년도부터 공동기도회를 가지면서 2009년도에 이르면 최초로 공동기도문을 작성하여 전 세계에 배포하기까지 했다. 아시아권 공교회가 기도일치문을 만든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 당시 기도회 주간에(2009년 1월 18일-25일)에 ‘그리스도인의 일치, 종교간 대화, 전쟁과 폭력, 세계화, 고통과 질병, 생명과 환경, 차별’을 주제로 모였다. 이 기도회에는 NCCK 소속 예장통합, 기하성,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기독교 대한 루터회, 구세군대한본영 등과 천주교주교회의, 정교회 한국 대교구 등이 참석하였다. 해마다 함께한 자리에서 그들은 결국 신앙과 직제 일치 위원회까지 구성하고 가톨릭과 개신교와의 일치운동을 확산시켜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 됨을 추구한다는 것을 백번 이해하고 듣고자 해도 그들의 도출한 결론은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의 인도는 진리가운데로 인도하기 때문이다(요 16:13).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요 15:26). 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 것이다.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 인도하는 참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지 아니하면 아무리 구조 혹은 직제가 하나라고 해도 그것은 결코 주님의 보편적 교회를 세우는 일이 아니다. 기본적인 진리에 대한 전제가 다른 이들과 상이점을 논의한다는 것 자체는 어불성설이다.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동일한 진리 안에서만 하나가 되는 일치 운동을 개진해 갈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출발이 다른 가톨릭과의 개신교의 교류는 마치 종교 간의 대화를 전제로 진리의 유일성과 독특성을 무너뜨리고 종교적 의식과 영적인 구도 방안 등 인간의 종교적 실천사항들만 부각될 뿐이다. 

가톨릭이 ‘진보’와 ‘청렴’의 이미지화를 통해서 국민들의 신뢰도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그들과의 대화나 교류가 개신교의 신뢰도를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들과의 교류는 가톨릭의 거짓된 교리와 가르침을 용인하는 꼴이 되고 개신교의 존재 이유를 부식시켜 결국은 가톨릭의 종교 통합 정책에 흡수되는 양상을 보일 것이다. 종교간의 대화를 내세우는 개신교 진영에 있는 자들이 하나같이 종교다원주의 사상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욱이 그들은 개신교를 가톨릭을 참 교회에서 이탈한 이단들 중 하나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개신교들과의 대화는 이단사상에 물든 이들을 교화하여 참 교회로 들어오게 하고자 하는 자비와 친절의 한 방편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명시한 것처럼 가톨릭은 이단 중의 이단이요 교황은 적그리스도의 대표 주자이다. 그들의 예배인 미사는 사단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인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장 6항, 존 녹스의 종교개혁사 참고).
  
나쁜 신학은 성경의 정확무오하고 충분한 권위를 무시하고 인간의 사유의 자유가 더 우선 순위에 두는 것이지 정통신학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 신학의 고유한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은 좋은 신학이지 나쁜 신학이 아니다.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을 인간들이 고안해 낸 것들에 의존하며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섬기게 만드는 종교적 행위를 강조하는 신학이야말로 사악한 것이다.
 
가톨릭 지도자들은 개신교와의 대화를 하면서도 그들이 가진 기본적인 입장은 전혀 변함이 없다. 바꾸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송용민 신부가 지적한 것처럼 자신들의 일관된 고백에 합치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자기들과 다른 이들(개신교)의 주장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한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양의 탈을 쓴 이리처럼 개신교가 그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는 분위기를 띠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과 손잡는 개신교회들은 하나같이 그들과 닮아가는 것이 되었지 그들을 개신교에 속하도록 이끈 역사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송신부의 말대로 개신교의 충만한 유산과 전통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과거 십자군 운동 때에 저질렀던 만행을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사과하였듯이 종교개혁 때 개혁가들과 그들을 추종한 개신교도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핍박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진정 어린 사과를 감행해야 하는 것이다. 2백만의 위그노들을 비롯한 수많은 개신교도들을 죽이고 핍박한 그들의 만행을 솔직히 시인하고 잘못을 구할 때 대화도 대화답게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일본의 만행을 감추고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한일관계가 개선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이 사과하지 않는 것은 개신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표현이거나 입으로는 인정하지만 여전히 개신교는 참된 교회가 아니기에 일치 운동을 통해서 가톨릭으로 흡수통일하자는 속내를 결코 철회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실지로 교황 프란치스카는 참된 교회밖에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교회는 로마 가톨릭 뿐이라고 하였다. 결국 그들과 함께 하는 교회 일치 운동은 종교개혁의 소중한 유산들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좋은 이미지인 청렴은 ‘보수적 불신자들’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 가톨릭 신앙이나 개신교 신앙을 가지지 않고서도 사회적으로 청렴결백한 시민들이 많이 존재한다. 불의를 대적하며 정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며 일상생활 속에서 거짓을 멀리하고 진실을 추구하며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고 착한 행실을 일삼는 보수적인 불신자들, 혹은 진보적인 불신자들이 사회 곳곳에 산재해 있다. 교회는 착한 행실을 통한 청렴이 트레이드마크가 아니라 오직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트레이드마크이다. 그 복음과 함께 고난의 길을 가지 아니하고 세속적인 부와 영화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는 세속주의의 유혹을 과감하게 떨처 버리지 아니하는 한 고상한 도덕 수양 종교의 하나로 전락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종교간의 대화를 무조건 피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역설적으로 대화는 해야 한다. 신앙과 직제의 일치를 위한 대화가 아니다. 사회의 공공선을 이루기 위한 각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은 반드시 실천되어야 한다. 가톨릭의 신정훈 신부가 말한대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종교간 대화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4종류의 대화 즉, 삶의 대화, 행동의 대화, 신학자들의 대화, 영성의 대화를 구분한다”고 했다. 
 
결국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눠진 분명한 선을 교묘하게 가리거나 없애고 그들의 목적대로 가톨릭으로의 통합을 꿈꾸는 것이다. 그 중에 “‘행동의 대화’는 사회 · 정치 영역에서 통합적인 인간의 해방을 촉진하기 위한 협력”이라고 말했는데 인간의 해방은 무엇으로부터 해방을 말하는가? 성경은 분명 죄와 사망으로 권세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그 일은 오직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에서만 가능하다. 가톨릭은 모호한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우매한 자들을 현혹시키는 사단의 교묘함을 빼닮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개신교가 겪는 아픔은 그러한 대화를 주도할 일군들 배출이 거의 안되어 있다는 것이다. 간혹 티브이 토론에서 만나본 개신교 논찬자들의 입은 버벅거리기 일수이다. 가톨릭과 불교에 비해 한참 뒤처지고 있다. 실질적인 부분에서 종교간의 분배를 한다고 해서 일이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전문적이냐에 달려있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 진영에서는 한마디로 탁월한 종교적 외교관 혹은 전문적인 종교적 정치인이 거의 없다.
 
종교적 외교관 혹은 전문적인 종교적 정치인이란 우리 개신교 신학에 철저하면서 타 종교인들과의 대화에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는 종교인을 말한다. 종교적 정치인이라고 하는 것도 교단 정치의 고단수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영화와 업적 쌓기 외에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정치인은 사회적인 이슈들을 교단의 신학적 입장에서 적극 대처하면서 국가와 국민을 상대로 교회의 유익을 구현시키는 Church-stateman이다. 
 
교단의 비대함에 비해서 전문성을 갖춘 지도자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인물난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런 인물들을 키워내지 못한 것을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설혹 인물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보다는 무너뜨리고자 하는 일들이 더 많기 때문에 역량있는 분들이 더러 있어도 나서질 못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개신교의 위상이 바닥을 기고 있고, 진보진영에서 가톨릭과의 신앙과 직제 일치를 위한 협의회를 구성하여 많은 개신교인들을 호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혁주의 진영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두 가지 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하나는 이제라도 전문인력을 찾아 그야말로 일할 수 있는 자리에 세우는 것이다. 종교간의 협력 문제를 잘 이끌 수 있는 지도자를 세우는 것과 교단의 정책과 특성들을 외부에 적절하게 알리며 공략할 수 있는 일군을 세우는 것이다. 
 
물론 이 일은 교단의 언론지인 기독신문과 교단의 총무 혹은 신학교 교수들이 그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입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교단의 정치 바람과 상관이 없는 순수한 집필진들을 구성하여 언론을 통한 선도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교수들 중에서도 뛰어난 문필가를 선정하여 교단의 신학적 기조를 분명히 하는 교단지 주필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또 하나는 우리 교단이 지향하고 있는 신학적 지식을 충분히 가르치는 일을 위한 교회 교육에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지금과 같이 교회성장의 한 방편으로서 교회 교육이 아니라 참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는 일을 위한 철저한 교회 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 이미 교리적인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 있다. 교단차원에서 선별하여 교회마다 주일학교 공과교육을 하듯이 교리교육이 철저하게 실시되도록 교단의 지도자들이 이끌어야 한다. 
 
모든 목사들과 장로들이 다 그런 일에 전문인이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합당한 교재를 선정해 주어서 그 교재에 수록된 대로 가르칠 수 있도록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 가톨릭은 이미 그들의 허황된 교리교육을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시키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이탈식구들이 개신교에 비해 훨씬 적은 것이다. 교리교육의 강화는 이단들이 기생하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이단들의 손길을 뿌리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그리고 진리에 충실한 일꾼들이 되게 한다. 교황이나 추기경과 같은 몇몇 인물의 대중성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반석(페트로스가 아닌 페트라)에 기초한 든든한 교회를 세워갈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우리 신학도들에게 고한다. 호구지책으로서의 종교인이 되고자 신학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자가 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면 복음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존 번연과 같이 ‘우리의 몸에 어디를 찔러도 우리 몸에서 흐르는 피가 말씀의 피여야 한다.’ 불교 고승들처럼 모든 경전을 다 암송하는 일을 못한다 할지라도 말씀의 전문인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양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성령은 진리와 함께 일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없는 진리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진리가 없는 성령 역시 비현실적이다. 그 진리의 영이 인도하시는 참 진리 안에서 우리는 하나여야 한다. 종교 직업인의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진리의 사람으로서 진리의 기둥과 터를 잘 세워가는 감독자들이어야 한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종교간의 대화에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며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 이해를 위한 종교가 아니라 인간 구원을 위한 종교이다. 기독교 복음은 로이드 존스의 주장처럼 토론 주제가 아니라 선포일 뿐이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과의 논쟁 장에서 사도 바울은 논쟁을 하면서 복음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부활을 전하였기 때문에 그들 철학자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자 했다. 그리하여 장시간 창조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했다. 대다수는 조롱하거나 결단하기를 꺼려하였지만 몇몇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믿는 자들이 되었다(행 17:16-34 참고). 사람들은 토론장에서 설득되는 것을 무척 꺼려한다. 그러나 선포하는 곳에서는 심령이 동하여 변화를 일으킨다. 이런 복음 선포자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으나 추수할 일군이 적은 것이 현실이다.
  
본 논고의 제목으로 돌아간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하나 될 수 있는가? 가톨릭이 견지하고 있는 신학적 기조를 버리지 않는 한 하나 될 수 없다. 진실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진리에 온 마음으로 동의하는 일이 없는 한 하나됨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개신교도들을 핍박한 엄연한 사실을 분명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전제되지 않는 그들과의 대화는 착한 행실 차원에서의 협력조차도 꺼리게 한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한 자들이 되게 하소서! 오, 주님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아멘!
 
서창원 교수(총신 신대원 역사신학)